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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풀뿌리 운동 고수들, 한자리에 모여 '수다'
작성자
루카
날짜
07-03-27 16:06
조회수
7,633

본문


"시민사회에도 거품... 한두 단체가 성과 독차지"
풀뿌리 운동 고수들, 한자리에 모여 '수다'
 
장안의 내로라 하는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니 장안은 서울을 이르는 말이니 장안의 고수는 아니다. 각 지역의 고수들이 모였다. 바로 풀뿌리 운동가들이다.

16·17일 천안에 있는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에서 '풀뿌리들의 수다'(후원 아름다운 재단)가 열렸다. 전국 각양각지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는 100여명의 풀뿌리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날 초대받은 고수들은 정외영(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모임)·고창권(희망세상)·윤혜란(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씨 등이다.

고수들의 수다떨기가 시작됐다. 수다판에 끼어들어 곁불을 쬐며 귀동냥을 하는 사람들도 고수를 꿈꾸는 풀뿌리 운동가들이었다.

고수들은 어떤 이유로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을까?

"주민들의 욕구 듣다보니 단체가 됐다"

서울 수유리에서 터를 잡은 정외영씨는 "이사 가서 만난 이웃 아줌마들과 차 한잔 마시자고 모였다가 일이 커졌다"고 말했다. 차 한잔 하다보니 공통의 관심사와 하고 싶은 일이 모아졌고 6명이 8명으로, 다시 수십명으로 늘어났다는 것.

의대 졸업 후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 고향으로 들어간 고창권씨는 '소년소녀 독거노인돕기후원회 소식지'의 편집을 돕다 지역일에 끼어 들었다. 마을 주민들이 꼭 알아야 할 정보를 모으고 주민들의 욕구를 소식지에 담아내는 사이 모임이 만들어졌다.

두 고수들 모두 목적을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닌 이웃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듣고 나누다보니 모임이 되고 단체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윤혜란씨는 천안 YMCA를 만들고 실무일을 하다 고민이 깊어진 경우다. 윤씨는 "시민단체에는 왜 평범한 시민들이 없고 전문가들만 북적일까를 놓고 고민했다"며 "사회복지 영역을 평범한 시민들과의 접촉점이라고 생각하고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고수로 불리는 이유는 주민들의 개인적 요구를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넓혀 나간 '과정'에 있다.

정씨는 "욕구도 진화하고 발전하고 변화한다"며 "욕구가 개인적으로만 존재하는지 여러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사람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고씨는 "모임에 아줌마들이 많았는데 남편들의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기 위해 술을 마시다 친해져 '좋은 아버지 모임'까지 만들게 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지역활동은 가족을 단위로 사고해야 참여도 커지고 가족기행 등 프로그램도 다양화된다"고 조언했다.

"단체에는 껍데기만 남기고 알맹이는 지역사회로"

윤씨는 '인큐베이팅'이라는 풀뿌리 운동의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인큐베이팅은 특정모임이나 단체에 일정기간 동안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활동을 말한다.

인큐베이팅 과정이 끝나면 조직도, 재정도, 활동가도 완전히 독립시킨다. 마치 아이를 키워 출가시키는 부모의 삶과 닮아 있다. 윤씨의 손을 거쳐 독립한 단체만도 충남장애인부모회, 미래를 여는 아이들 등 여러 개다.

윤씨는 "처음에는 장애인 부모님들을 만나 어려움을 듣고 어떻게 도울까를 고민했다"며 "하지만 결국 끝까지 싸울 사람은 우리 단체가 아니라 장애인 학부모들이고 그들 스스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인큐베이팅 과정은 주민 속으로,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라며 "활동의 성과를 특정 단체에 남기는 게 아닌 지역사회에 남기겠다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수들에게도 고민은 있다. 이들이 느낀 풀뿌리 활동의 고충은 무엇일까?

윤씨는 "한국 시민사회의 네트워크에는 거품이 많다"고 꼬집었다.

"한국 시민사회의 네트워크가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거품과 피해의식 때문이다. 여기저기 연대체에 가보면 이름만 걸어놓은 단체가 많다. 또 단체들끼리 함께 결합해서 열심히 일하는 데 결국 성과는 한 두 개 특정단체가 다 가져간다."

"한국 시민사회엔 거품이 많다... 한두 단체가 독차지"

이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특별하지 않지만 새겨들을 만 하다. 윤씨는 "개별단체가 지역사회문제를 다 풀 수 없는 만큼 각 단체의 에너지를 모으는 네트워크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지역사회 활동과제를 놓고 경험의 폭을 넓히고 활동성과를 참여 단체 모두가 나눠갖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씨는 "개별 단체가 연대조직에 참여하다 조직목표가 위협받거나 방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따라서 명분보다는 참여할 실무력 등 주체여건이 일정하게 갖춰졌을 때 결합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씨는 "특정사안을 놓고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경우 지역 주민의 힘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화합을 위해 필요한 경우 실무적으로 일을 뒷받침하는 일 외에 자리나 공과를 모두 다른 단체나 사람들에게 넘긴다"고 말했다.

단체내부의 갈등구조도 풀어 헤쳐 졌다.

윤씨는 "한국시민운동의 경우 이사결정과정에 가장 적극적인 그룹이 이사회와 사무국인데 갈등의 골 또한 깊다"며 "개인적으로도 이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후죽순으로 비영리단체가 늘어나는데 이를 몇 사람이 중복 출연하다보니 결정구조가 건강하지 않다"며 "한국의 비영리운동에 적합한 이사회-사무국-주민조직간 관계형성 및 갈등해소 사례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나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씨는 "단체가 커지면서 상근 실무자가 주로 판단을 할 상황에 직면하자 회원들간 소외감 등 갈등이 생겼다"며 "회원들간 긴밀한 관계가 약해질때 생기는 문제인 만큼 소통구조를 원할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씨는 "처음에는 실무자와 회원간 오해도 있고 약간의 충돌도 있었다"며 "하지만 오랜 토론을 통해 협력자임을 인지하고 전폭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됐다"며 "상호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수들의 조언 "주민 속으로 들어가라"

이들이 후배 풀뿌리 운동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한마디는 무엇일까?

정외영 "처음부터 어떻게 하겠다는 세부적인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역사회가 조금 더 행복해 졌으면, 서로 조금 만 더 존중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런 생각으로 주민들과 만나고 얘기하다보니 힘을 주고 받는 일이 찾아졌다. 의욕이 있다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고 함께 만들어가라. 믿음을 갖고 들어가서 만나라. 그러면 함께 해결될 것이다."

고창권 "민주주의는 제도가 바뀌는 것만으로 이루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체험이고 실천이다. 이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곳(주민들 속)에 오래 개겨야 한다."

윤혜란 "풀뿌리는 마음뿌리다. 마음에 감동을 줘서 변화를 일으키는 운동이다. 개인적으로 풀뿌리 운동이 좋다. 하지만 접고 싶을 만한 몸과 마음이 지친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운동성을 지켜가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개인의 결단과 헌신에만 의존할 것인가. 적어도 활동은 계속하고 싶은데 몸과 마음이 지쳤을 경우 이를 개인의 결단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지원해 주는 체계가 있었으면 한다.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자. 이전엔 시대상황에 밀려 당위성으로 일을 했지만 지금은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이 변화하는 것을 보며 행복해 하는가에 대한 자기성찰이 전제돼야 한다고 본다. 더디게 가더라도 바닥에서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풀뿌리 운동 고수들의 수다는 풀뿌리 활동가들의 분임 수다로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들의 수다는 풀뿌리 운동의 정의에서부터 주민조직 활동 방법까지 그칠 줄 몰랐다.

후배 풀뿌리 활동가들이 고수들과의 수다 속에서 얻은 화두 또한 다양했다. '욕구' '뚜벅뚜벅' '풀씨' '마음 뿌리' '진정성'이 그것이다.

한 참가자는 풀뿌리 운동의 정의에 대해 "반드시 지역에 들어가 주민을 조직하는 것만이 풀뿌리 운동이라는 것은 협소한 인식인 것 같다"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게 하는 것 자체가 풀뿌리 운동"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그동안 시민단체의 활동이 보도자료 쓰고 자치단체 등과 주민을 대신해 싸우는 기능적 운동이었다면 이제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 사람을 모아 들이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 참가자는 "우리 단체의 경우 그동안 자치단체 예산분석을 실무자 중심으로 하다가 올해를 시민모니터단으로 확대해 주민들의 참여에 의의를 뒀다"고 소개했다. 이어 "예산분석을 어떻게 할까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할까에 방점을 찍게 된 것은 지역주민을 어떻게 하면 주체로 세울까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지역의변화를 꿈꾸는 지역활동가들의 주된 고민은 무엇일까?

이날 한 분임의 수다 속에서 나온 얘기를 대략 정리해 보면 ▲단체 중심에서 시민사회 전체로 사업내용 확장하기 위한 방법 ▲지역 주민들이 함께 변화하는 방법 ▲지역주민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안 등 다양했다.

이들이 풀어내는 고민에는 하나같이 지역사회의 변화를 향한 소박하지만 진지한 열정과 희망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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